석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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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경 石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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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한 중기의 관료 | |
| 이름 | |
| 휘 | 경(慶) |
| 작호 | 목구후(牧丘侯)〔전한〕 |
| 시호 | 염(恬) |
| 신상정보 | |
| 출생일 | 불명 |
| 출생지 | 하내군 온현(溫縣) |
| 사망일 | 기원전 103년 |
| 사망지 | 장안 |
| 국적 | 전한 |
| 성별 | 남성 |
| 관직 | 내사〔전한〕 → 태복〔전한〕 → 제상〔전한〕 → 패군태수〔전한〕 → 태자태부〔전한〕 → 어사대부〔전한〕 → 승상〔전한〕 |
| 부친 | 석분 |
| 형제자매 | 형 석건 외 2명 |
| 자녀 | 아들 석덕 |
| 군사 경력 | |
| 주군 | 무제 |
석경(石慶, ? ~ 기원전 103년)은 전한 중기의 관료로, 하내군 온현(溫縣) 사람이다. 석분의 막내아들이자 낭중령 석건의 동생으로, 4형제가 모두 효성스럽고 품행이 발라 명성을 떨쳤다.
생애
[편집]건원 2년(기원전 139년), 석건이 낭중령에 임명될 때 내사에 임명되었다.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 무제는 태자를 책봉하고 신하들 중 태자의 스승이 될 만한 자를 찾았다. 이때 패군태수였던 석경은 태자태부가 되었고, 7년 후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
원정 5년(기원전 112년) 가을, 죄를 지어 파면된 승상 조주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고 목구후(牧丘侯)에 봉해졌다.
석경은 승상을 지내는 동안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어떤 진언도 하지 않았다. 일찍이 무제의 측근인 소충(所忠)과 감선을 벌하여야 한다고 상주하려 하였으나, 둘의 죄를 자백받기는커녕 도리어 무고죄로 몰려 속죄금을 낸 적이 있었다.
원봉 4년(기원전 107년), 관동(關東)에 2백만 명의 유민이 발생하였다. 이들 중 호적이 없는 자가 40만 명이나 되니, 공경들은 상의 끝에 유민들을 변방에 귀양 보낼 것을 주청하였다. 무제는 석경이 늙은 데다가 지나치게 신중하므로 이 일을 함께 논의할 수 없다고 여겨, 석경에게 휴가를 주어 집으로 보내고 어사대부 이하의 관원들과 회의하였다. 석경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 사직을 청하였으나, 무제가 조서를 내려 자신을 꾸짖으니 매우 부끄러워하고 다시 일을 보았다.
일화
[편집]내사 재임 중, 술에 취하여 집에 올 때 마을 문을 들어와서도 수레에서 내리지 않았다. 석분은 이 소식을 들은 뒤로 밥을 먹지 않았고, 석경이 이에 어깨를 드러내어 벌 받기를 청하였으나 석분은 용서하지 않았다. 온 가족과 형 석건이 함께 사죄하니 비로소 석분은 석경을 꾸짖었다.
| “ | 내사는 고귀한 신분이니 마을에 들어서면 노인들은 모두 길을 피해서 숨고, 내사는 수레 안에서 태연하게 앉아 있는 것이 당연하겠지! | ” |
그러고는 용서하니, 이후로 석경을 비롯한 자제들은 마을에 들어올 때부터 잰걸음으로 집으로 들어왔다.
태복 재임 중, 무제의 수레를 몰고 외출할 때의 일이었다. 무제가 석경에게 말 몇 마리가 수레를 끄는지 물어보니, 석경은 채찍으로 말을 다 세어본 후에야 여섯 마리라고 대답하였다. 석경은 형제들 중에서 가장 성격이 무난하였는데도 이 정도였다.
출전
[편집]- 사마천, 《사기》 권103 만석군장숙열전
- 반고, 《한서》 권46 만석위직주장전
| 전임 인 |
전한의 내사 기원전 139년 ~ 기원전 138년? |
후임 석편 |
| 전임 관부? |
전한의 태복 기원전 138년? ~ 기원전 135년?[1] |
후임 공손하? |
| 전임 장탕 |
전한의 어사대부 기원전 115년 ~ 기원전 112년 |
후임 복식 |
| 전임 조주 |
전한의 승상 기원전 112년 ~ 기원전 103년 |
후임 공손하 |
| 선대 (첫 봉건) |
전한의 목구후 기원전 112년 9월 정축일 ~ 기원전 103년 |
후대 아들 석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