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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32稿 新しい風の周波数

双子の記憶と、言葉を聴く技術


第31稿で、私は釜山で通訳を始めた頃のことを書いた。
失敗のあとに届いた一通のメール。
その言葉に救われ、もう一度立ち上がろうと思えた日のことだ。

あの稿を書いたあと、私はしばらく、自分の中に残っている「言葉の記憶」について考えていた。

言葉とは、ただ意味を伝える道具ではない。
人を励ますこともあれば、黙らせることもある。
可能性の扉を開くこともあれば、自分で閉じてしまうきっかけにもなる。

6月の札幌には、今日もどこか落ち着かない風が吹いている。
ニュースを見ても、街を歩いていても、これまでの常識が音を立てて崩れ、新しいパラダイムへ移っていくような感覚がある。

その風は、いくつもの国境や境界線を越えて生きてきた私の肌を、かすかに撫でていく。

そして、ふと思い出すのだ。
かつて韓国で、英語を教えていた頃のことを。

中高生から、大学教授を目指す医療従事者のような大人まで、私はさまざまな人に英語を教えた。

不思議なことに、生徒としては、大人のほうが教えやすかった。
彼らは、自分の時間とお金を使って来ている。
だから、なんとか成果を持ち帰ろうとする。
わからないことがあれば質問し、覚えられなければ何度でもやる。
必死さがある。

一方、学生たちは少し違った。
もちろん真面目な子もいた。
けれど多くの場合、どこか「学生として座っている」感じがあった。
自分の未来のために学んでいるというより、義務としてそこにいる。
その差は、学力よりも、姿勢の差として現れていた。

ある時、私の教室に二卵性双生児の中学一年生が通ってきた。
男女の双子だった。

二人はとても仲がよく、いつも一緒にやってきた。
数分の差で先に生まれた姉と、その姉に対して幼い頃「大きくなったら結婚する」と言っていたという弟。
家ではきちんと序列を決め、弟は姉のことを「お姉ちゃん」と呼んでいた。

微笑ましい兄妹だった。

女の子は英語が得意だった。
男の子は数学が得意だった。
最初は、英語の成績にも、それほど大きな差はなかった。

けれど、時間が経つにつれて、二人の間に少しずつ違いが出てきた。

女の子は、黙々と反復学習を続けた。
単語を覚え、文法を確認し、間違えたところを直していく。
特別な才能というより、淡々と続ける力があった。

一方で、男の子は成績が落ち始めると、急に苦しくなっていった。
間違ったところを説明しても、耳を塞ぐようになった。
以前は熱心に覚えてきた英単語も、次第に覚えなくなった。

あんなに仲が良かった姉とも、口論をすることが増えた。

二人はいつも、ベビースターラーメンのようなおやつを楽しそうに分け合って食べていた。
その時間が、私は好きだった。
子どもたちが、ただ子どもらしく、何の屈託もなく笑っている時間だったからだ。

けれど、そのおやつの時間にも、少しずつ影が差していった。
一緒に食べていた二人が、いつの間にか違う方向を見始めている。
そんな切ない気配があった。

英語に差がついた理由は、能力の差ではなかったと思う。

男の子は、ある瞬間に思ってしまったのだ。
「英語では、姉に勝てない」と。

まだ本格的なスタートラインに立ったばかりだった。
これからいくらでも伸びる可能性があった。
頭が悪いわけでも、才能がないわけでもない。

それなのに彼は、自分で可能性のドアを閉めてしまった。

私は、とても切ない気持ちになった。

そして今、こうして大人になった自分自身を振り返ると、ふと思う。
私たち大人もまた、同じことを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

ほんの少しの挫折。
誰かとの比較。
一度うまくいかなかった経験。
それだけで、「自分には向いていない」と決めてしまう。

本当はまだ始まってもいないのに、もう終わったことにしてしまう。

言語を学ぶことは、特別な魔法ではない。
中学校レベルの文法と単語をしっかり身につければ、外国人と対話することは十分に可能だ。
もちろん流暢に話すには時間がかかる。
けれど、相手と向き合い、聞き取り、伝えようとするところまでは、誰でも行ける。

その時に何より大切なのは、「聞くこと」だ。

私は日本語を勉強していた時、日本のドラマをひたすら見た。
周囲から「テレビっ子」とからかわれるほどだった。
興味のある日本の雑誌のトピックを、日本人の知人に録音してもらい、それを何度も聞いた。
漢字にひらがなでルビを振り、辞書を引き、声の流れを追った。

韓国語と日本語の文法が似ていることも、もちろん助けになった。
けれど、それ以上に大きかったのは、耳が少しずつ日本語のリズムに慣れていったことだった。

ある日、相手の言葉が、水の流れのように自分の中に入ってくる瞬間があった。
意味を一つずつ拾うのではなく、流れとして入ってくる。
あの感覚を、私は今もはっきり覚えている。

以前、ある本で、スパイに外国語を早く習得させる方法について読んだことがある。
そこには、言語にはそれぞれ固有の「周波数」がある、と書かれていた。

習得したい言語の音をあらかじめ脳に聞かせ、その帯域にチューニングしてから学習を始める。
そうすると、その言語が驚くほど記憶に定着しやすくなるのだという。

真偽を専門的に検証できるわけではない。
けれど、私はこの話がとても好きだ。

なぜなら、言語を学ぶということは、単語や文法を詰め込む前に、その世界の音に自分を開くことだからだ。

日本語には、日本語の呼吸がある。
韓国語には、韓国語の勢いがある。
英語には、英語の距離感がある。
それぞれの言語は、ただ違う音を持っているだけではない。
そこには、文化の体温がある。

言語は文化であり、文化は「関心」を持った時に初めて面白くなる。

周波数を合わせるとは、相手の文化や未知の世界に対して、心を開いて耳を澄ませることなのだと思う。

今、世界には新しい風が吹いている。

価値観が揺らぎ、見知らぬ文化や異なる世代の考え方が、国境を越えて押し寄せてくる。
これまで正しいと思っていたものが、突然古く見えることもある。
当たり前だった言葉が、ある日から通じなくなることもある。

その時、私たちは、耳を塞ぐこともできる。
あの時の双子の弟が、姉の声や英語の説明から耳を塞いだように。

けれど、もし少しだけチューニングを変えられたら。
もし、自分とは違う周波数に、ほんの少し耳を澄ませることができたら。

そこには、まだ見ぬ対話の可能性が広がっているはずだ。

今はもう、あの双子たちと連絡を取っていない。
二人もきっと立派な大人になり、社会のどこかで一生懸命に生きているのだと思う。

英語が上手になったかどうかは、もうどうでもいい。
数学が得意だったか、英語が得意だったかも、今となっては大きな問題ではない。

ただ今日は、あの二人が幸せそうにおやつを食べていた姿を思い出す。
ベビースターラーメンを分け合いながら、何の疑いもなく隣に座っていた二人。
まだ自分の可能性を疑っていなかった、あの時間。

人は、いつから自分の可能性を疑い始めるのだろう。
そして、いつから他人の声を聞く前に、自分の中で答えを閉じてしまうのだろう。

第31稿で、私は一通のメールに救われた話を書いた。
今回思い出したのは、耳を塞いでしまった少年の姿だった。

どちらも、言葉の記憶である。

人を立ち上がらせる言葉がある。
人が自分から閉じてしまう言葉もある。
そして、まだ言葉になる前の周波数のようなものが、人生にはある。

大転換の予感がする今。
私はもう一度、自分の周波数を調整したいと思う。

新しく吹く風の音に、静かに耳を澄ませる。
まだ聞いたことのない言葉を、怖がらずに聞いてみる。
まだ出会っていない世界に、自分の耳を少しだけ開いてみる。

6月の札幌の風は、今日もどこか不穏である。
けれど、その風の中には、次の時代の音も、きっと混じっている。

私はそれを、聞き逃したくない。

제32장 새로운 바람의 주파수


쌍둥이에 대한 기억과 말을 듣는 기술

제31장에서 내가 부산에서 통역 일을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를 썼다.

실패했다고 생각한 후에 도착한 한 통의 메일.

그 말에 위로를 받아 다시 한번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날이다.

그 글을 쓴 뒤, 나는 잠시 동안 내 안에 남아 있던 ‘말의 기억’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말은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사람을 격려하기도 하고, 침묵케도 한다.

가능성의 문을 여는 경우도 있고, 스스로 닫아버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6월의 삿포로는 오늘도 어딘가 불안한 바람이 불고 있다.

뉴스를 보든, 거리를 걷든, 지금까지의 상식이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동하려는 느낌이 든다.

그 바람이 여러 국경과 경계선을 넘어 살아온 나의 피부를 살며시 스쳐 지나간다.

영상.

그리고 문득 떠오른다.

예전에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시절이.

중,고등학생부터 대학 교수를 목표로 하는 의료인 같은 어른까지, 나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신기하게도, 학생입장이라면 어른을 가르치기가 더 쉬웠다.

그들은 자신의 시간과 돈을 쓰면서 온다.


그래서 어떻게든 성과를 가지고 가려 애를 쓴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질문하고, 기억하지 못하면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한다.

필사적인 모습이 있다.

한편, 학생들은 조금 달랐다.

물론 진지한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어디선가 ‘학생으로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배우는 것이라기보다, 의무감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차이는 학력보다 자세 차이로 나타났다.

어느 날, 내 교실에 이란성 쌍둥이가 중학교 1학년 때 찾아왔다.

남녀 쌍둥이였다.


두 아이는 매우 사이가 좋았고, 언제나 함께 왔다.

몇 분 차이로 먼저 태어난 누나와, 그 누나에게 어릴 적엔 ‘크면 결혼하자’고 말했던 동생.

집에서는 엄격하게 서열을 정했고, 동생은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흐믓한 미소가 떠오르게 하는 오누이였다.

그 소녀는 영어를 잘했다.

그 소년은 수학을 잘했다.

처음에는 영어 성적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 사이에 조금씩 차이가 생겨났다.

소녀는 조용히 반복 학습을 계속했다.

단어를 외우고, 문법을 확인하며, 틀린 부분을 고쳐 나갔다.

특별한 재능이라기보다, 담담히 계속해 나가는 힘이 있었다.

한편, 남자 아이는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갑자기 힘들어졌다.

잘못된 부분을 설명해도 귀를 막는 듯했다.

예전엔 열심히 외우던 영어 단어도 점점 외우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친했던 누나와도 말다툼 하는 일이 늘었다.

두 사람은 언제나 베이비스타 라면 같은 간식을 즐겁게 나눠 먹고 있었다.

그 시간이 나는 좋았다.

아이들이 그저 아이답게, 아무런 얽매임 없이 웃고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간식 시간에도 조금씩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함께 먹던 두 아이가 어느새 다른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 안타까운 분위기가 있었다.

영어에 차이가 생긴 이유는 능력 차이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소년은 어느 순간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영어로는 누나를 이길 수 없어’라고.

이제 본격적인 출발선에 막 섰을 뿐이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머리가 나쁜 것도 재능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렸다.

매우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어른이 된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문득 생각한다.

우리 어른들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조금의 좌절.

누군가와의 비교.

한번 잘 되지 않았던 경험.

그것만으로 ‘내게 맞지 않는다’고 결정해 버린다.

사실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미 끝난 일로 여기고 만다.

언어를 배우는 것은 특별한 마법이 아니다.

중학교 수준의 문법과 어휘를 확실히 익히면 외국인과 대화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유창하게 말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상대와 마주하고, 듣고, 전달하려는 단계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것’이다.

내가 일본어를 공부하던 시절, 나는 일본 드라마를 몰두해서 봤다.

주변 사람들에게 ‘텔레비전 애호가’라고 놀림받을 정도였다.

관심 있는 일본 잡지의 토픽이 있으면 일본인 지인에게 녹음해 달라고 부탁해서,

그것을 여러 번 들었다.


한자에 히라가나로 토를 달고, 사전을 찾아가며, 목소리의 흐름을 따라갔다.

한국어와 일본어 문법이 비슷한 점도 물론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귀가 조금씩 일본어 리듬에 익숙해졌다는 점이었다.

어느 날, 상대방의 말이 물이 흐르듯 내 안으로 스며드는 순간이 있었다.

의미를 하나씩 줍는 것이 아니라 흐름으로 들어온다.

그 감각을 나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스파이에게 외국어를 빨리 습득시키는 방법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거기에는 언어마다 고유한 ‘주파수’가 존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배우고 싶은 언어의 소리(주파수)를 미리 뇌에 들려주고, 그 대역에 튜닝한 뒤 학습을 시작한다.

그렇게 하면 그 언어가 놀라울 정도로 기억에 잘 남는다고 한다.

진위 여부를 전문적으로 검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정말 좋아한다.

왜냐하면 언어를 배우는 것은 단어와 문법을 채우기 전에 그 세계의 소리에 자신을 열어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어에는 일본어만의 호흡이 있다.

한국어에는 한국어만의 힘이 있다.

영어에는 영어만의 거리감이 있다.

각각의 언어는 단순히 다른 소리를 가지고 있는것 뿐만 아니다.

그곳에는 문화의 체온이 있다.

언어는 문화이며, 문화는 ‘관심’을 가질 때 비로소 흥미로워진다.

주파수를 맞춘다는 것은 상대의 문화나 미지의 세계에 대해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세계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가치관이 흔들리고, 낯선 문화와 다른 세대의 사고방식이 국경을 넘어 밀려온다.

그동안 옳다고 생각해 온 것이 갑자기 오래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말이 어느 날부터 통하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때 우리는 귀를 막을 수도 있다.

그때 쌍둥이 동생이 누나의 목소리와 영어 설명을 듣고 귀를 막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튜닝을 바꿀 수 있다면.

만약 자신과 다른 주파수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그곳에는 아직 보지 못한 대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쌍둥이들과 연락을 하지 않는다.

두 사람도 분명 훌륭한 어른이 되어 사회 어딘가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어가 늘었는지 어떤지는 이제 신경 쓰지 않는다.

수학을 잘했는지, 영어를 잘했는지도 이제는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두 아이가 행복하게 간식을 먹고 있던 모습을 떠올린다.

베이비스타 라면을 나눠 먹으며, 아무 의심도 없이 옆에 앉아 있던 두 사람.

아직 자신들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았던 그 순간.

사람은 언제부터 자신의 가능성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일까.

그리고 언제부터 남의 소리를 듣기 전에 스스로 답을 닫아버리는 걸까.

제31장에서 나는 한 통의 메일에 구원받은 이야기를 썼다.

이번에 떠오른 것은 귀를 막아버린 소년의 모습이었다.

두 경우가 모두 말의 기억이다.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말이 있다.

사람이 스스로 닫아버리는 말도 있다.

그리고 아직 말로 표현되지 않은 주파수 같은 것이 인생에 존재한다.

대전환의 예감이 드는 지금.

나는 다시 한 번 내 주파수를 조정하고 싶다.

새롭게 부는 바람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아직 들어보지 못한 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들어본다.

아직 만나보지 못한 세계에, 내 귀를 살짝 열어본다.

6월의 삿포로 바람은 오늘도 어딘가 불안하다.

하지만 그 바람 속에는 다음 시대의 소리도 분명 섞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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